우르눈갈라(역사서에 적힌 이름은 우르눈갈)
길가메쉬의 딸. 내내 인지받지 못하고 있다가 길가메쉬가 불로불사약을 찾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야 간신히 인지받고 이름을 받게 됨.
성에 불려갈 정도로 뛰어난 무희였던 어머니와 영웅왕 아버지를 쏙 빼닮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미인. 길가메쉬에 비하면 색조가 옅은 금발과 붉은 눈동자. 몸매는 가느다란 편이라고 쓰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고 읽는다.
화를 내는 것도 몸에 부담이 갈 정도로 병약한 몸.
신중하고 차분하며 다정다감한 성격.
길가메쉬만큼은 아니지만 통찰안을 보유.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 특기.
2018. 11. 24. 수정
신화대계에 있어 훌륭한 핏줄과 비극적인 출생은 영웅적인 미래를 약속한다지만 소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들은 그녀가 친부를 얽어맬 수 있는 족쇄가 되길 바랐다. 결핍은 동정을 낳기 마련이며 혈연은 그 자체로 애틋한 법. 몸이 약한 아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부모를 보며 신들은 혈육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기대했다. 영웅왕에게 인간의 피는 삼분지 일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우르크의 왕 길가메쉬는 사명을 내팽개치고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밤마다 악기 연주와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던 나날들 사이에 작은 생명이 태어났다. 무희는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제사장은 아이를 왕께 보였다. 영웅왕은 진노했다. 인간의 형태를 띤 재해와도 같은 분노에 모든 이가 엎드려 몸을 떨었다. 숨 한 조각을 간신히 틔운 작은 것에게 분노 어린 눈길이 꽂혔다. 작은 아기에게 허락된 외진 곳의 작은 궁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친부에게 인지되지 못하고 이름도 받지 못한 처지에 성장까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신의 피를 타고난 아이들은 으레 빠르게 성장하기 마련이건만 아이에게 깃든 신의 피는 꼴딱 숨이 넘어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 모양이었다. 햇살을 모아 빚어낸 것만 같은 연한 금발과 금빛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진홍색 눈동자는 친부를 쏙 빼닮아 인형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뿐이었다. 뛰어놀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오래 산책을 할라 치면 꼭 앓아누워 의사를 불러야만 했다. 왕의 하나뿐인 혈육이었으나 그뿐. 왕의 횡포는 그 자체로 재해였으므로 생존자들은 버려진 공주에게 오랜 시간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르크의 공주에 대한 소문은 잡초처럼 퍼져나갔다. 아름다운 여자라면 어리더라도 가치가 있던 시대였다. 하물며 우르크를 다스리는 왕의 딸이라면 더 말 붙일것도 없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궁 밖의 흙을 디뎌본 적도 없건만 우르크의 성곽에는 목이 잘린 영웅들의 머리가 잘린 시기에 따라 피를 줄줄 흘리거나 썩기도 하고, 골격만 남아 버석하게 부스러지기도 했다.
왕이 진노했다는 이야기가 들린 날에는 언제나 성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있는 곳은 잘린 머리들의 이목구비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멀었으나 새로운 머리가 늘어났는지 여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새로운 머리가 성곽에 올라갔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계집아이를 약탈하려고 했던 영웅들의 머리를 바라보던 아이는 약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영웅을 잡아먹는 마굴이었고, 자신은 마굴에 영웅들을 끌어들이는 미끼였다. 원망이 가슴을 치며 올라왔다. 그러나 감히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미움과 공포는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아무것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태양을 등졌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래. 아이는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점토판에 적힌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총명한 아이의 앞에 세상은 너무나도 쉽게 진실을 덮은 거죽을 들춰보였다. 사람을 파악하는 일은 날숨을 토하는 일 만큼 자연스러웠다. 글을 익히고 적당히 예의를 차릴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 사뭇 날카로웠다. 누군가가 알현실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친부를 만났다. 두 쌍의 붉은 눈이 서로를 담았다. 왕은 즉시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아이는 시선을 내리깔고 호흡마저 조심했다. 부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가 서로를 읽었음을 깨달았다. 아이의 통찰은 영웅왕 길가메쉬의 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가 가진 혐오와 분노의 근원까지 가 닿기에는 충분했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저것을 치워라!”
그녀를 데려온 이는 불똥이라도 튈 새라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물러났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이는 또다시 앓아누웠다. 고열과 오한이 번갈아 찾아오며 어린 숨통을 짓눌렀다. 절로 눈물이 흘러나와 베갯잇을 적셨다. 아이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친부에 대한 의문은 유년기를 잠식하고 있는 최대의 의문이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 웃어야 옳다. 그러나 아이가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몇 방울의 눈물과 짓눌린 신음이 고작이었다.
자신을 옭아매기 위해 만들어진 사슬을 사랑하는 이가 어디 있으랴.
신들은 길가메쉬의 운명을 비틀어 작고 연약한 혈육을 붙여주었다. 네가 신대의 종언을 막지 않는다면 네 연약한 자식도, 그 자식의 자식들마저도 모두 끝을 맞이하리라. 그것은 비열한 인질극이었고 되도 않는 협박이었다. 영웅왕은 그 모든 일에 신물이 난 것이다. 신대의 종언을 막기 위한 용도로 태어났으나 고작 그 뿐, 길가메쉬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였다. 아이는 영웅왕에 대한 신들의 시험이었고 호시탐탐 발목을 노리는 족쇄였다. 태어나자마자 죽이지 않은 것 만 해도 그는 충분히 큰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아이는 그 모든 사실을 이해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뚱이는 타인을 겨냥한 협박이었다. 신들이 의도한 태생이란 영웅의 증거이나 아이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일 뿐아이. 아니나다를까 몸뚱이는 깨달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밤새도록 혼절과 흡사한 잠과 발작 같은 각성 사이를 헤메던 아이는 동이 틀 무렵, 고열과 함께 울분도, 억울함도 모두 내려놓았다. 고고한 이상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약해빠진 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만 오래 걸어도 열이 오르는 몸뚱이는 우는 것 마저 벅찼다. 어쩌면 몸종 앞에서 부왕이 밉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홀로 입을 다물고 날카로운 단어를 꼭꼭 씹어 삼켰다. 홀로 남은 침실에서 눈만 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한 빛깔의 가림막 너머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샌 탓인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미열이 오르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미워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는 감히 왕을 이해했다.
위대한 왕은 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옳았다. 아이는 정녕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부를 원망하는 일 조차.
*
채 자라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던 몸뚱이는 느리게나마 꾸역꾸역 성장했다. 약과 점토판에 매몰되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으니 기실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 조차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침묵의 나날 속에 소녀가 되었다.
그러던 도중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싱그럽고 다정한 눈을 한 여인이었다. 시두리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거침없이 아이에게 간섭했다. 따스한 포옹과 야무진 손길이 낯설었다. 아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두리는 얼마 전까지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이슈타르 여신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고, 그렇다면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 정상이었다. 일전의 제사장은 노환으로 죽었으니 당장 배워야 할 일만 산더미일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따스한 관심이 달콤하여 며칠을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았다. 마침내 아이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이름도 받지 못한 나에게는 귀한 시간을 할애할 만큼 가치가 없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네. 체온을 식힌다 약을 먹인다 부산스럽게 굴던 시두리를 붙들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이는 처음으로 꾸지람을 들었다. 설교는 길지 않았으나 끝마무리는 소화가 잘 되는 묽은 스프와 늘 달고 다니던 약이었다. 아이는 얼떨떨함을 끌어안고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은 겁도 없이 자신을 꾸중하는 젊은 제사장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
우르크의 신민들이 아이를 생각하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아무리 그들의 왕이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민들에게 있어 아이는 왕의 적녀였고, 공주였다. 왕이 증거를 대보라며 뻗대보았자 그들은
“폐하.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두 분이 똑같이 생겼다니까요.”
따위의 소리를 하며 길가메쉬의 복장을 뒤집어놓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길가메쉬는 아직 젊어 자식 귀여운 줄 모르는 아비였고 아이는 그런 아비 밑에서 고생하는 안쓰러운 공주님이었다. 다른 이를 원망할 줄도 몰라 매일 밤을 자책하다 잠드는 아이를 위해서는 그저 오냐오냐 받아줄 이들이 필요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시두리는 우크르의 신민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강건하고 유쾌한 그들과 만나면 아이 역시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아이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환경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는 정신적인 고난을 너무나 많이 겪은 나머지 미숙한 몸에 비해 정신이 지나치게 웃자란 아이가 되고 있었다. 그녀의 왕은 왕으로서는 존경하고 따를만한 인물이었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을 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왕 본인에게는 딸자식을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의 죄겠는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된 일은 개인의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 시두리는 고개를 젓고 아이의 앞에서만이라도 왕에 대한 한숨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애썼다. 아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시두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성채 밖의 햇살에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곳곳에서 공주님, 하고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들이 다가왔다. 아이와 시두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둘은 왕과 마주치지 않도록 후문으로만 드나들고 왕의 행차 소리가 들리면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지만 꾸준히 성채 밖으로 나섰다. 아이는 종종 자기 발로 걸어 나가기 힘들 지경이 되어 시두리에게 안기면서도 산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주님을 부르며 달려온 이들은 곧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를 묻고 가지고 있던 과일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단검을 꺼내 제일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잘라 한입씩 먹였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육은 병약한 아이가 먹기에도 무리가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여도 좋은 일 역시 있다. 시두리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어미처럼 붙어있거나 왕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아이의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으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시두리는 부드러운 천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
“공주님. 손님이 오셨어요.”
시두리의 뒤에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이는 점토판을 내려놓으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갔다. 평범한 아이라면 힘껏 달려가 품에 안겼겠지만 아이에게는 침대에서 내려가 몇 걸음 걷는 것도 대단한 환영인사였다.
“마술사님.”
마술사라 불린 이가 먼저 아이에게 다가가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언제나 함께 해 주는 이는 아니었으나 며칠, 혹은 몇주에 한번 이루어지는 만남이 더없이 달았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네.”
“아픈 곳은 없고?”
아이는 대답 대신 웃었다. 마술사는 엷은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더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손은 아이의 머리부터 몸 곳곳을 쓸어내렸다. 약식의 마술적 검사였다. 흐름의 뒤틀림이 심하지 않다면 몇 번 어루만지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뒤틀림이 생각보다 크면 약물과 마술적 처치가 필수적이었다. 마술사는 안부를 묻는 질문을 몇 번 더 던져보며 아이를 안아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이의 병약한 몸은 신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속임수 몇 개를 중첩시키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두어개의 뒤틀림을 풀어주자 아이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단다.”
마술사는 손톱만한 크기의 달콤한 과자 몇 개를 내밀었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간식거리들 중 하나였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뒤틀림이 응어리에 가까워진 부분을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흐름을 풀어주는 일은 주의 깊게 진행되었다. 건강한 아이였다면 손속을 적당히 사려도 무방했겠지만 아이의 몸은 약간의 리스크도 허용하기 힘들 만큼 연약했다. 섬세한 유리세공품을 다루는것도 이보다는 안정적일 지경이었으니.
몸 곳곳에 엉겨붙은 고통의 잔재가 마술사의 손길 아래 물을 만난 소금처럼 녹아내린다. 아이는 거의 다 녹은 과자를 꼭꼭 씹어 삼키곤 마술사의 품에 기댔다. 마술사가 영웅왕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메소포타미아 땅에 사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그런 마술사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지 궁금했다. 다만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런 것을 물어보았다가 마술사가 다시는 자기를 보지 않게 될까봐 덜컥 겁이 났다. 아이는 모든 의문을 혀 끝에 올리고 목 너머로 삼켰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인 시늉을 한다. 시두리가 곁에 있어주는 것도 부족했더냐. 비열한데 욕심만 많구나. 아이는 남몰래 자조하면서도 마술사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품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따스했으므로.
*
마술사는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쓸어넘겼다. 총명하고 반듯한 이마에 희미한 달그림자가 닿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침실에는 희미한 꽃향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후각적인 것 보다 마법적인 감각에 발 걸친 향기임에도 그것이 꽃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또렷한 개념을 띠고 있으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의 마술회로는 개수도 훌륭하며 질 역시 신의 피를 이은 만큼 우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이가 만들어낸 향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수상한 점은-.
아이가 곤히 잠들었다. 숨소리가 희미하고 규칙적으로 바뀌자 은은하게 방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깊게 잠들어야만 꽃향기가 배어나온다는 것. 마술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안녕.”
꽃의 마술사는 그야말로 꽃처럼 웃었다. 아이는 익숙하게 인사를 하며 주변을 곁눈짓했다. 지평선, 아니 화평선花平線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르크는 기후 특성상 나무와 꽃이 귀하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꽃밭이라니. 비현실성이 강해서 도리어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었다. 꽃의 마술사는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어느새 단면이 곱게 닳은 나무둥치가 있었다. 아이와 꽃의 마술사는 마주보며 앉았다.
“그래, 이름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니?”
“네.”
“빨리 진짜 이름이 생기면 좋겠구나. 그러면 좀 더 선명하게 너와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말이야. ”
자신을 멀린이라고 소개했던 마술사는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성의한 손길에 고개가 이리저리 꺾였지만 아이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멀린은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꿈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만나자마자 자신이 어떤 소녀를 키우고 있다며 다짜고짜 말문을 열었다. 그 당시 아이는 특이한 꿈이구나,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그의 고민-그가 애지중지하는 소녀가 보이는 ‘이해하지 못 할’ 행동들-에 대한 분석과 대처방안을 제시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대가로 멀린은 아이에게 마술을 가르쳐주려고 했지만 그는 좋은 말로라도 훌륭한 스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수업은 대주제를 알려주지 않고 흥미 위주로 선택한 곁가지로 시작해서 멀린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로 연관이 있는 중요한 맥락을 겉핥기로 시작하고 갑자기 마술사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화두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었다. 퍼즐의 조각을 한 두개씩 찔끔찔끔 뿌려주며 맞춰보라는 식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그의 설명을 당장 이해하기보다 일단 모든 것을 기억해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몸이 약해 직접 마술을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마술회로 역시 몸의 일부였기에.
“제 조언이 도움이 되나요?”
“물론이지.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는걸.”
아이는 늘 그렇게 묻고 멀린의 웃음기 어린 대답을 받았다. 아이에게는 또래 친구도 없고 자신이 나잇대에 맞지 않게 사고하는 특이한 아이라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니 멀린에게 어린 아이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에 한없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런 만큼 멀린의 긍정적인 대답에 진실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그 스스로가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아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에게 있어서 꽃의 마법사 멀린은 마치 인간에게 호기심을 가진 다른 생물종처럼 느껴졌다. 진리를 꿰뚫는 지식은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나 그 뿐. 인간의 감정을 모르니 인간을 이해할줄 모른다. 그는 아이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끝없이 질문을 이어갔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 묻혀있는 거부감을 툭툭 건드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가 ‘그런’ 이라는 것에 적응한지도 오래. 아이는 어느새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생각 깊던 아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둘의 대화는 도란도란 이어지다가 달이 질 무렵이 돼서야 끝이 났다.
*
꽃향기가 멎었다. 밤새 아이의 머리맡을 지키던 마술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꽃향기를 흘리는 마술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이 아닌 곳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목적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마력의 가닥 너머에서 느껴지는 무신경함이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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