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마술사는 용의 심장을 가진 소녀를 사랑하고 말았다.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그에게 사랑을 가르친 소녀는 기어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꽃의 마술사는 온갖 감정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뚫린 수맥처럼 감정이 흘러넘쳤으나 멀린은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 꿈 너머에서 만난 작은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하마터면 자신의 손으로 왕의 앞날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멀린은 인내심을 돋우어 준 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느때보다 공들여 꿈을 다듬었다.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한 아이의 아름다움에도 지지않을 만큼 아름다운 꿈이 자락을 펼쳤다.
지고한 왕의 피를 이은 소녀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신의 저주였다. 여러 신성이 심혈을 기울여 짜낸 저주의 멍에는 멀린으로서도 쉬이 벗겨줄 수 없었다. 꿈속마저도 따라오는 쇠약의 저주를 풀어내는 것은 육신의 업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힘들었다. 대신 멀린은 아이가 바라고 바래왔던 것을 조금만이라도 맛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꿈속은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보이는 공간. 달이 뜨고 해가 지는 짧은 시간 동안 신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멀린은 선물을 건넨 사람의 심정으로 꿈속의 아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언제나 호수물처럼 차분하기만 하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웬걸, 작은 은인은 당혹스러워하고 황망해하더니 이내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깊게 숨을 쉬어도 가슴이 아프지 않은 몸, 달려도 다리 힘이 풀리지 않는 몸. 크게 소리를 질러도 목과 머리가 아프지 않고 향기로운 것을 먹고 마셔도 배가 아프지 않은, 건강하여 평범한 몸을 겪게 해 주었는데 어째서 우는걸까. 멀린은 멀거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어째서…….”
울음 섞인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어째서!!”
외침은 차라리 비명소리같았다. 목소리에 올올이 배인 비통함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멀린은 당황했다. 제어하던 이가 흐트러지자 꿈이 요동쳤다. 바닥이 흔들리자 아이가 크게 휘청였다. 멀린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아이는 멀린의 손을 뿌리치고 꿈의 균열 사이로 떨어졌다.
찰나동안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붉은 눈동자에 담겨있는 것은 절절한 비탄과 날카로운 원망이었다. 꿈이 무너져내렸다.
*
가장 먼저 이변을 감지한 사람은 마술사였다. 아이의 방은 그 어느 때 보다 진한 꽃향기가 가득해 숨을 쉬는 것조차 꺼림찍했다.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 너머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렸다. 마술사는 거침없이 침실에 발을 들였다. 마술의 신비가 서린 꽃향기는 그 자체로 결계나 다름없었지만 해주는 손짓 몇 번이면 충분했다. 누가 감히. 마술사는 웅크려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분노를 씹어 삼켰다.
아이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수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실증언적인 의미대로. 격렬한 감정을 토해내는 것만으로도 병약하고 작은 몸은 순식간에 한계에 다다랐다. 몸을 무너뜨릴 만큼 무거운 비애가 감겨있던 영혼의 눈을 띄웠다.
마안이 깨어났다.
*
"시두리. 그것에게 마음을 쓰지 마라."
한껏 찌푸려진 왕의 미간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시두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전을 나섰다. 왕의 진노가 등을 떠밀 기세로 쏟아졌지만 시두리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
엘키두의 죽음은 우르크를 흔들었다. 신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왕의 친우가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친우의 죽음 앞에 한참을 방황하던 왕은 어느날 지구라트에 올라 오랫동안 우르크 전역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왕은 종적을 감추었다.
신민들은 사라진 왕을 기다렸으나 통치자를 잃은 나라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이름없는 공주는 그들을 규합할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왕 잃은 백성들은 나라를 떠나갔다. 시두리는 홀연히 사라진 왕에게 한마디 해줄 때 까지 결코 떠나지 않겠다 벼르며 자리를 지켰다. 소녀는 시두리의 곁에 남았다. 가없는 기다림은 그 자체로도 힘겹다. 시두리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지만 소녀는 그녀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작은 비관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읽어냈다.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소녀는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 곳을 바라보더라도 새파란 하늘만이 가득 눈에 들어온다. 소녀는 해를 등지는 방향으로 서서 영혼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선별選別의 마안.
마안이 발동하자마자 눈과 연결된 마술회로가 비명을 질렀다. 격통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통증을 참는 것은 익숙하다. 천리안과 달리 소녀의 마안에는 제약이 수두룩했다. 그녀의 마안은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여 확정적으로 시간선에 붙들어 매 버린다. 만약 그녀가 선택한 미래가 가능성이 없는 헛된 예측이라면 미래는 아무런 억지력도 없이 흘러간다. 그 점을 보완하는 것은 관위의 마술사를 흉내내는 수준의 현재시, 그리고 어설픈 현재시를 분석하고 가능성을 예측할 만큼 영리한 머리의 몫이었다. 마안도, 어설픈 현재시도 꽃의 마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그의 배신을 겪지 않았더라면 얻을 일 없었을 것들이었다. 그 날의 비통함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붉은 선혈이 방울방울 떨어지더니 흙먼지 엉킨 벽돌 위에서 산산조각났다. 소녀는 코를 적시고 흐르는 핏물을 방치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재’의 모든 정보가 밀려들어와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다. 육신의 눈이 흐린 것이 또다시 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정보를 선별하고 가능성을 계산했다. 왕의 귀환이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면 소녀는 정말 목숨을 걸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와 시두리에게는 다행히도 왕의 귀환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소녀는 왕이 귀환하는 날들 중 가장 빠른 시일을 골라 시간선에 고정시켰다. 뜨끈한 것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소녀는 그것을 삼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렸다. 이런 것은 오히려 막으려고 했다가는 울혈 때문에 큰일이 난다. 소녀는 몇 번이나 미래를 확인한 뒤 마안을 감고 거처로 돌아갔다. 소녀의 몰골을 본 시두리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걸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인의 손과 함께 아득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시두리는 느린 성장에 맞추어 천천히 영글어가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보며 오랜 고뇌 끝에 손을 더하는 장인의 솜길을 떠올렸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했건만 며칠, 몇 주, 몇 달 뒤에 다시금 바라보면 과거보다 더욱 빼어난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목구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시두리와 눈이 마주치자 쑥쓰러운 듯 사랑스럽게 웃음지었다. 시두리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때때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본래는 폐허가 된 우르크 시가지에서 무언가 이득을 보기 위해 찾던 이들이었다. 방랑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거칠고 위험한 분위기를 무기처럼 두르고 있던 그들은 이내 소녀를 발견했다. 폐허에 남아있는 것은 슬슬 연륜이 쌓이기 시작한 제사장과 소녀 뿐. 소녀가 기르는 사자도 사냥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방랑자들이 소녀를 데려가고자 했다면 시두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을 테지만 시두리는 그런 불상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한 바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넋이 나간 얼굴로 소녀를 바라만 보던 방랑자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지극한 경배를 올리는 와중에도 방랑자들은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는 것을 힘겨워했다. 그들은 소녀와 시두리의 의식주를 살피고 몇마디 대화를 나눈 뒤 보다 풍요가 남아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식재와 약재, 옷가지 따위를 들고 다시금 찾아올 때 즈음 그들은 방랑자가 아닌 순례자가 되어있었다. 시두리는 그들의 경건한 몸짓에서 순례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소녀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섬기는 신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는 것 또한 불경의 일종인 즉.
*
영초를 잃었으나 깨달음을 얻었다.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보였다. 벅찬 감정을 정리하며 우르크가 있을 방향을 헤아리던 길가메쉬는 문득 눈이 닿은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천리안을 가진 이나 간신히 알아챌 수 있을 표식이었다.
영초를 찾으러 가는 여정 내내 저 표식들이 몇 번이나 길가메쉬의 시선을 잡아끌었던가. 불로불사에 대한 갈망에 눈이 멀었을 때는 그토록 짜증스럽기만 하던 표식들이 지금 이 순간은 불안한 얼굴로 집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어린아이처럼 애처롭게만 보였다. 표식이란 곧 길이었다. 알아볼 눈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생긴 오솔길처럼 보일테지만 길가메쉬는 이 길들이 모두 우르크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길은 모두 길가메쉬가 영초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뒤에 생겼다. 생긴 경위를 알아내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딸은 우르크를 떠나는 신민들에게 조언과 함께 사소한 부탁을 건넨 것이다. 어딘가에 도착하면 나뭇가지를 꺾거나 돌멩이 몇 개를 치워달라는 식의, 유용한 조언에 비하면 한없이 사소하여 부담없는 부탁들. 우르크를 떠난 신민들이 남긴 것은 작은 나비날갯짓이었다. 그러나 나비가 일으킨 작은 바람은 곧 서로가 일으킨 바람과 맞물려 태풍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들이 모두 길가메쉬의 귀환을 앙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우르크로 돌아갈 미래를 시간선에 고정시켜놓기까지 했으면서도 이런 복잡하고 섬세한 안배에까지 신경을 쓰다니.
헛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무릇 덧없고 연약하다지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딸은 그 정도가 더 심각했다. 그런 몸으로 이런 복잡한 업을 짊어지다니,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길의 끝에 딸이 있다. 대화는커녕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병약한 딸이. 길가메쉬는 보물고에 남아있는 영약들의 종류와 개수를 헤아렸다. 그것의 위중한 상태를 생각하면 영웅왕으로서도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 너무 오래 글을 안썼더니 손이 심각하게 무뎌짐....................... 쓰는것에 의의를 두는걸로............
+ 우르눈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내가 그거를 묘사를 못한다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가 딸이니까 양심 버리고 미모 묘사해도 될거같다는 그런 느낌(눕기
세상을 부수고 만드는 것만 같은 굉음은 7일 밤낮동안 이어졌다. 귀를 괴롭히는 소음이 사라진 뒤에도 청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과연 놀라웠다. 우르크의 신민들 사이로 폭군 길가메쉬가 친우를 사귀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왕이 드디어 폭정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도 함께. 훔바바의 삼나무 숲, 그리고 성창 샴하트와 그의 이야기까지, 길가메쉬 왕의 둘도 없는 벗-엘키두의 정체를 유추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을 위한 참된 안배. 하늘의 쐐기를 바로잡는 올바른 사슬. 아이는 희미한 한숨과 함께 소외감을 수용했다. 애초에 이 땅 위에 아이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었다. 인정하고 수용한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확정이 나 버리니 마음속 깊은 곳이 울렁였다. 다시금 원망이 흉곽 안쪽에 소록소록 쌓인다. 신들은 이미 왕을 위한 안배를 준비해 두었다. 엘키두에 대한 소문은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친부가 어릴적부터 우르크에 자자했다. 그토록 오래된 인연을 준비해놓고 왜 자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만약을 위한 안전장치라 하기에 자신은 한없이 미약하고 무력할 뿐인데.
아이는 잘 조성된 정원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우울감이 깊어지자 가장 두려워하던 생각이 다시금 발목을 잡아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몫인가. 인지받지 못하여 이름조차 없다. 몸뚱이는 병약하기 짝이 없어 화를 내는 것 조차 여의치 않다.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은 어쩌면 공연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는 우르크의 사람들을, 시두리를, 때때로 찾아와주는 마술사를, 그리고 꿈같은 인연들마저 모두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주어진 것들이 그것들 뿐이기에, 약해빠진 몸뚱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랑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사색 속에 누군가가 어깨를 잡았다. 시두리도, 마술사도 이런 식으로 잡지 않는다. 아이는 놀라 눈을 떴다. 그 모습이 마치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 같아, 아이의 어깨를 잡은 장본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가 바로 길의 아이구나?”
연두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스르륵 흘러내렸다. 초목의 빛깔을 담은 투명한 눈동자 너머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아이와 엘키두의 첫만남이었다.
*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이는 진품과 모조품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격지심이란 무릇 모자란 것이 완벽한 것을 바라보는 감정일 터다. 그러나 엘키두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신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들을 원망하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이렇게 태어나게 만들었다. 친부의 마음을 돌릴만한 무기는커녕 뭇 사람들의 동정심이나 자극할 비루한 몸뚱이 하나를 건네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죽고싶지 않았을 따름이라.
앙금처럼 쌓인 원망은 날이 갈수록 단단히 굳었다. 그 모습이 추하고 비참하여 아이는 가진 바 원망을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참고 또 참았다. 참는 일은 익숙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다사다난하기에 평범한 나날들의 갈피 사이에 이야기가 하나 둘 채워졌다. 엘키두가 느닷없이 찾아와 새끼 사자를 선물해 준 날이 있었고, 마술사의 손을 잡고 강 위를 산책한 날이 있었다.
아이는 해를 거듭하며 아름다워졌다. 성인 남자의 허리께나 간신히 닿을만한 어린시절부터 빼어나던 생김이 시간이 더해질 수록 깊어졌다.활기와 건강미가 절제切除된 자리에 섬세함과 우아함이 스며들었다. 희고 반듯한 이마에 흘러내린 한 가닥의 금발마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금실을 방불케했다. 이다가 햇빛을 쪼이며 살며시 눈을 내리뜨면 그 아름다움에 익숙한 이들마저 때때로 숨을 죽이고 넋을 잃기 일쑤였다. 투명한 보석에 투과시켜 산란하는 햇살 중 가장 순수한 것만 모아 빚으면 이러할까. 길가메쉬 왕의 용안에도 익숙한 우르크의 신민들 역시 나날이 더해가는 왕녀의 아름다움에 한계가 있을지 궁금해하기까지 했다. 성벽에 영웅의 머리가 걸리는 일에는 모두들 충분히 익숙해져있었다.
길가메쉬의 딸. 내내 인지받지 못하고 있다가 길가메쉬가 불로불사약을 찾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야 간신히 인지받고 이름을 받게 됨.
성에 불려갈 정도로 뛰어난 무희였던 어머니와 영웅왕 아버지를 쏙 빼닮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미인. 길가메쉬에 비하면 색조가 옅은 금발과 붉은 눈동자. 몸매는 가느다란 편이라고 쓰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고 읽는다.
화를 내는 것도 몸에 부담이 갈 정도로 병약한 몸.
신중하고 차분하며 다정다감한 성격.
길가메쉬만큼은 아니지만 통찰안을 보유.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 특기.
2018. 11. 24. 수정
신화대계에 있어 훌륭한 핏줄과 비극적인 출생은 영웅적인 미래를 약속한다지만 소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들은 그녀가 친부를 얽어맬 수 있는 족쇄가 되길 바랐다. 결핍은 동정을 낳기 마련이며 혈연은 그 자체로 애틋한 법. 몸이 약한 아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부모를 보며 신들은 혈육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기대했다. 영웅왕에게 인간의 피는 삼분지 일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우르크의 왕 길가메쉬는 사명을 내팽개치고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밤마다 악기 연주와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던 나날들 사이에 작은 생명이 태어났다. 무희는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제사장은 아이를 왕께 보였다. 영웅왕은 진노했다. 인간의 형태를 띤 재해와도 같은 분노에 모든 이가 엎드려 몸을 떨었다. 숨 한 조각을 간신히 틔운 작은 것에게 분노 어린 눈길이 꽂혔다. 작은 아기에게 허락된 외진 곳의 작은 궁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친부에게 인지되지 못하고 이름도 받지 못한 처지에 성장까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신의 피를 타고난 아이들은 으레 빠르게 성장하기 마련이건만 아이에게 깃든 신의 피는 꼴딱 숨이 넘어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 모양이었다. 햇살을 모아 빚어낸 것만 같은 연한 금발과 금빛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진홍색 눈동자는 친부를 쏙 빼닮아 인형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뿐이었다. 뛰어놀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오래 산책을 할라 치면 꼭 앓아누워 의사를 불러야만 했다. 왕의 하나뿐인 혈육이었으나 그뿐. 왕의 횡포는 그 자체로 재해였으므로 생존자들은 버려진 공주에게 오랜 시간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르크의 공주에 대한 소문은 잡초처럼 퍼져나갔다. 아름다운 여자라면 어리더라도 가치가 있던 시대였다. 하물며 우르크를 다스리는 왕의 딸이라면 더 말 붙일것도 없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궁 밖의 흙을 디뎌본 적도 없건만 우르크의 성곽에는 목이 잘린 영웅들의 머리가 잘린 시기에 따라 피를 줄줄 흘리거나 썩기도 하고, 골격만 남아 버석하게 부스러지기도 했다.
왕이 진노했다는 이야기가 들린 날에는 언제나 성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있는 곳은 잘린 머리들의 이목구비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멀었으나 새로운 머리가 늘어났는지 여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새로운 머리가 성곽에 올라갔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계집아이를 약탈하려고 했던 영웅들의 머리를 바라보던 아이는 약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영웅을 잡아먹는 마굴이었고, 자신은 마굴에 영웅들을 끌어들이는 미끼였다. 원망이 가슴을 치며 올라왔다. 그러나 감히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미움과 공포는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아무것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태양을 등졌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래. 아이는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점토판에 적힌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총명한 아이의 앞에 세상은 너무나도 쉽게 진실을 덮은 거죽을 들춰보였다. 사람을 파악하는 일은 날숨을 토하는 일 만큼 자연스러웠다. 글을 익히고 적당히 예의를 차릴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 사뭇 날카로웠다. 누군가가 알현실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친부를 만났다. 두 쌍의 붉은 눈이 서로를 담았다. 왕은 즉시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아이는 시선을 내리깔고 호흡마저 조심했다. 부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가 서로를 읽었음을 깨달았다. 아이의 통찰은 영웅왕 길가메쉬의 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가 가진 혐오와 분노의 근원까지 가 닿기에는 충분했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저것을 치워라!”
그녀를 데려온 이는 불똥이라도 튈 새라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물러났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이는 또다시 앓아누웠다. 고열과 오한이 번갈아 찾아오며 어린 숨통을 짓눌렀다. 절로 눈물이 흘러나와 베갯잇을 적셨다. 아이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친부에 대한 의문은 유년기를 잠식하고 있는 최대의 의문이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 웃어야 옳다. 그러나 아이가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몇 방울의 눈물과 짓눌린 신음이 고작이었다.
자신을 옭아매기 위해 만들어진 사슬을 사랑하는 이가 어디 있으랴.
신들은 길가메쉬의 운명을 비틀어 작고 연약한 혈육을 붙여주었다. 네가 신대의 종언을 막지 않는다면 네 연약한 자식도, 그 자식의 자식들마저도 모두 끝을 맞이하리라. 그것은 비열한 인질극이었고 되도 않는 협박이었다. 영웅왕은 그 모든 일에 신물이 난 것이다. 신대의 종언을 막기 위한 용도로 태어났으나 고작 그 뿐, 길가메쉬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였다. 아이는 영웅왕에 대한 신들의 시험이었고 호시탐탐 발목을 노리는 족쇄였다. 태어나자마자 죽이지 않은 것 만 해도 그는 충분히 큰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아이는 그 모든 사실을 이해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뚱이는 타인을 겨냥한 협박이었다. 신들이 의도한 태생이란 영웅의 증거이나 아이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일 뿐아이. 아니나다를까 몸뚱이는 깨달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밤새도록 혼절과 흡사한 잠과 발작 같은 각성 사이를 헤메던 아이는 동이 틀 무렵, 고열과 함께 울분도, 억울함도 모두 내려놓았다. 고고한 이상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약해빠진 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만 오래 걸어도 열이 오르는 몸뚱이는 우는 것 마저 벅찼다. 어쩌면 몸종 앞에서 부왕이 밉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홀로 입을 다물고 날카로운 단어를 꼭꼭 씹어 삼켰다. 홀로 남은 침실에서 눈만 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한 빛깔의 가림막 너머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샌 탓인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미열이 오르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미워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는 감히 왕을 이해했다.
위대한 왕은 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옳았다. 아이는 정녕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부를 원망하는 일 조차.
*
채 자라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던 몸뚱이는 느리게나마 꾸역꾸역 성장했다. 약과 점토판에 매몰되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으니 기실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 조차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침묵의 나날 속에 소녀가 되었다.
그러던 도중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싱그럽고 다정한 눈을 한 여인이었다. 시두리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거침없이 아이에게 간섭했다. 따스한 포옹과 야무진 손길이 낯설었다. 아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두리는 얼마 전까지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이슈타르 여신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고, 그렇다면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 정상이었다. 일전의 제사장은 노환으로 죽었으니 당장 배워야 할 일만 산더미일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따스한 관심이 달콤하여 며칠을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았다. 마침내 아이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이름도 받지 못한 나에게는 귀한 시간을 할애할 만큼 가치가 없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네. 체온을 식힌다 약을 먹인다 부산스럽게 굴던 시두리를 붙들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이는 처음으로 꾸지람을 들었다. 설교는 길지 않았으나 끝마무리는 소화가 잘 되는 묽은 스프와 늘 달고 다니던 약이었다. 아이는 얼떨떨함을 끌어안고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은 겁도 없이 자신을 꾸중하는 젊은 제사장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
우르크의 신민들이 아이를 생각하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아무리 그들의 왕이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민들에게 있어 아이는 왕의 적녀였고, 공주였다. 왕이 증거를 대보라며 뻗대보았자 그들은
“폐하.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두 분이 똑같이 생겼다니까요.”
따위의 소리를 하며 길가메쉬의 복장을 뒤집어놓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길가메쉬는 아직 젊어 자식 귀여운 줄 모르는 아비였고 아이는 그런 아비 밑에서 고생하는 안쓰러운 공주님이었다. 다른 이를 원망할 줄도 몰라 매일 밤을 자책하다 잠드는 아이를 위해서는 그저 오냐오냐 받아줄 이들이 필요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시두리는 우크르의 신민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강건하고 유쾌한 그들과 만나면 아이 역시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아이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환경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는 정신적인 고난을 너무나 많이 겪은 나머지 미숙한 몸에 비해 정신이 지나치게 웃자란 아이가 되고 있었다. 그녀의 왕은 왕으로서는 존경하고 따를만한 인물이었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을 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왕 본인에게는 딸자식을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의 죄겠는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된 일은 개인의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 시두리는 고개를 젓고 아이의 앞에서만이라도 왕에 대한 한숨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애썼다. 아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시두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성채 밖의 햇살에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곳곳에서 공주님, 하고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들이 다가왔다. 아이와 시두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둘은 왕과 마주치지 않도록 후문으로만 드나들고 왕의 행차 소리가 들리면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지만 꾸준히 성채 밖으로 나섰다. 아이는 종종 자기 발로 걸어 나가기 힘들 지경이 되어 시두리에게 안기면서도 산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주님을 부르며 달려온 이들은 곧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를 묻고 가지고 있던 과일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단검을 꺼내 제일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잘라 한입씩 먹였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육은 병약한 아이가 먹기에도 무리가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여도 좋은 일 역시 있다. 시두리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어미처럼 붙어있거나 왕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아이의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으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시두리는 부드러운 천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
“공주님. 손님이 오셨어요.”
시두리의 뒤에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이는 점토판을 내려놓으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갔다. 평범한 아이라면 힘껏 달려가 품에 안겼겠지만 아이에게는 침대에서 내려가 몇 걸음 걷는 것도 대단한 환영인사였다.
“마술사님.”
마술사라 불린 이가 먼저 아이에게 다가가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언제나 함께 해 주는 이는 아니었으나 며칠, 혹은 몇주에 한번 이루어지는 만남이 더없이 달았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네.”
“아픈 곳은 없고?”
아이는 대답 대신 웃었다. 마술사는 엷은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더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웃었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손은 아이의 머리부터 몸 곳곳을 쓸어내렸다. 약식의 마술적 검사였다. 흐름의 뒤틀림이 심하지 않다면 몇 번 어루만지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뒤틀림이 생각보다 크면 약물과 마술적 처치가 필수적이었다. 마술사는 안부를 묻는 질문을 몇 번 더 던져보며 아이를 안아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이의 병약한 몸은 신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속임수 몇 개를 중첩시키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두어개의 뒤틀림을 풀어주자 아이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왔단다.”
마술사는 손톱만한 크기의 달콤한 과자 몇 개를 내밀었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간식거리들 중 하나였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뒤틀림이 응어리에 가까워진 부분을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흐름을 풀어주는 일은 주의 깊게 진행되었다. 건강한 아이였다면 손속을 적당히 사려도 무방했겠지만 아이의 몸은 약간의 리스크도 허용하기 힘들 만큼 연약했다. 섬세한 유리세공품을 다루는것도 이보다는 안정적일 지경이었으니.
몸 곳곳에 엉겨붙은 고통의 잔재가 마술사의 손길 아래 물을 만난 소금처럼 녹아내린다. 아이는 거의 다 녹은 과자를 꼭꼭 씹어 삼키곤 마술사의 품에 기댔다. 마술사가 영웅왕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메소포타미아 땅에 사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그런 마술사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지 궁금했다. 다만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런 것을 물어보았다가 마술사가 다시는 자기를 보지 않게 될까봐 덜컥 겁이 났다. 아이는 모든 의문을 혀 끝에 올리고 목 너머로 삼켰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인 시늉을 한다. 시두리가 곁에 있어주는 것도 부족했더냐. 비열한데 욕심만 많구나. 아이는 남몰래 자조하면서도 마술사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품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따스했으므로.
*
마술사는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쓸어넘겼다. 총명하고 반듯한 이마에 희미한 달그림자가 닿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침실에는 희미한 꽃향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후각적인 것 보다 마법적인 감각에 발 걸친 향기임에도 그것이 꽃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또렷한 개념을 띠고 있으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의 마술회로는 개수도 훌륭하며 질 역시 신의 피를 이은 만큼 우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이가 만들어낸 향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수상한 점은-.
아이가 곤히 잠들었다. 숨소리가 희미하고 규칙적으로 바뀌자 은은하게 방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깊게 잠들어야만 꽃향기가 배어나온다는 것. 마술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안녕.”
꽃의 마술사는 그야말로 꽃처럼 웃었다. 아이는 익숙하게 인사를 하며 주변을 곁눈짓했다. 지평선, 아니 화평선花平線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르크는 기후 특성상 나무와 꽃이 귀하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꽃밭이라니. 비현실성이 강해서 도리어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었다. 꽃의 마술사는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어느새 단면이 곱게 닳은 나무둥치가 있었다. 아이와 꽃의 마술사는 마주보며 앉았다.
“그래, 이름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니?”
“네.”
“빨리 진짜 이름이 생기면 좋겠구나. 그러면 좀 더 선명하게 너와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말이야. ”
자신을 멀린이라고 소개했던 마술사는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성의한 손길에 고개가 이리저리 꺾였지만 아이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멀린은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꿈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만나자마자 자신이 어떤 소녀를 키우고 있다며 다짜고짜 말문을 열었다. 그 당시 아이는 특이한 꿈이구나,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그의 고민-그가 애지중지하는 소녀가 보이는 ‘이해하지 못 할’ 행동들-에 대한 분석과 대처방안을 제시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대가로 멀린은 아이에게 마술을 가르쳐주려고 했지만 그는 좋은 말로라도 훌륭한 스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수업은 대주제를 알려주지 않고 흥미 위주로 선택한 곁가지로 시작해서 멀린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로 연관이 있는 중요한 맥락을 겉핥기로 시작하고 갑자기 마술사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화두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었다. 퍼즐의 조각을 한 두개씩 찔끔찔끔 뿌려주며 맞춰보라는 식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그의 설명을 당장 이해하기보다 일단 모든 것을 기억해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몸이 약해 직접 마술을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마술회로 역시 몸의 일부였기에.
“제 조언이 도움이 되나요?”
“물론이지.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는걸.”
아이는 늘 그렇게 묻고 멀린의 웃음기 어린 대답을 받았다. 아이에게는 또래 친구도 없고 자신이 나잇대에 맞지 않게 사고하는 특이한 아이라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니 멀린에게 어린 아이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에 한없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런 만큼 멀린의 긍정적인 대답에 진실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그 스스로가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아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에게 있어서 꽃의 마법사 멀린은 마치 인간에게 호기심을 가진 다른 생물종처럼 느껴졌다. 진리를 꿰뚫는 지식은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나 그 뿐. 인간의 감정을 모르니 인간을 이해할줄 모른다. 그는 아이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끝없이 질문을 이어갔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 묻혀있는 거부감을 툭툭 건드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가 ‘그런’ 이라는 것에 적응한지도 오래. 아이는 어느새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생각 깊던 아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둘의 대화는 도란도란 이어지다가 달이 질 무렵이 돼서야 끝이 났다.
*
꽃향기가 멎었다. 밤새 아이의 머리맡을 지키던 마술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꽃향기를 흘리는 마술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이 아닌 곳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목적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마력의 가닥 너머에서 느껴지는 무신경함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한 소녀가 부친을 찌르고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무도한 계집을 불태우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나 그에 불이 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비로샤나나 만나라.
요 근래 들어 자주 들리기 시작한 저주였다. 비로샤나는 탈와르 두 자루를 들고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도둑이었다. 혼자서 움직이는 주제에 무예가 어찌나 뛰어난지 수많은 경비와 크샤트리아들을 때려눕히고부자나 브라만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땅에 사는 부녀자들을 훔쳐가는 대단한 놈들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비로샤나가 맞이한 아내들만 50에 다다른다고 할 정도였다. 두료다나는 고민끝에 카르나에게 비로샤나의 토벌을 부탁했다. 앙가의 왕 카르나는 친우의 우환을 귀담아 듣고 기꺼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카르나는 단신으로 비로샤나를 찾아갔다. 도적은 모습을 숨기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에게 맞섰다. 카르나는 비로샤나에게 속죄와 반성을 권했으나 돌아온 것은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한 쌍의 탈와르였다.
공방전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지평선에 닿아있던 태양이 산봉우리에 걸릴 무렵, 카르나가 비로샤나에게 물었다.
"비로샤나여. 너는 정녕 사내가 맞는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거냐."
비로샤나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 검을 받아보면 알 수 있다. 왜 지금까지 네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챈 이가 없었지?"
"하! 그 유명한 카르나가 이렇게 말이 많은 자였나? 이봐, 멍청한 아왕이여.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
둘은 3일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첫날과 둘째날은 무승부였으나 마지막 3일째, 비로샤나는 카르나에게 패배했다. 비로샤나가 탈와르 한 자루를 놓친 순간 숲에서 여인들이 달려나와 카르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들은 카르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비로샤나를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비로샤나는 으르렁거리고 발버둥쳤으나 다른 여성들이 비로샤나에게 온몸으로 매달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비로샤나가 약탈했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그리고 바이샤들의 딸과 아내들이었다. 카르나는 아연한 낯으로 창을 내렸다. 그에게는 애초에 비로샤나를 죽일 생각이 없기도 했다. 아왕은 여인들을 물리고 쓰러진 비로샤나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비로샤나. 경이로운 여인이여. 그대의 왼편이 예정된 이가 없다면, 부디 나를 그 자리에 두어 주오."
두 남녀는 3일에 걸친 전투 끝에 서로에게 맹렬하게 빠져들었다. 카르나와 마음을 나눈 비로샤나는 두료다나의 영토만은 약탈하지 않을 것을 약조했다. 카르나는 그녀가 약탈을 그만두고 평화롭게 살길 바랬으나 비로샤나의 태도는 완강했다. 카르나는 결국 반쪽짜리 평화를 받아들인 뒤 비로샤나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
카르나는 자신의 삶에 세 가지나 되는 행운이 깃들었음에 언제나 감사했다. 첫째는 육신과 태양의 갑옷을 주신 친부모의 존재요, 둘째는 버려진 자신을 거둬주신 양부모의 존재요, 세번째는 반려가 되어준 비로샤나-아누슈카의 존재였다.
달의 신 찬드라의 가호를 받는 여인은 은으로 주조한 탈와르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카르나의 마음을 약탈했다. 뛰어난 무용으로 이릎 높은 그도 사랑 앞에서는 평범한 사내에 불과했다. 구름 낀 밤과 같은 카르나의 세상에 아누슈카라는 이름의 보름달이 떠올랐다. 땅에 발 붙인 인간이 새의 날개를 동경하듯, 카르나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매양 당당한 그녀를 사랑했고, 동경하며, 존경했다.
*
누군가의 평범한 딸이었을 아누슈카는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찌르고, 도적의 가면을 쓰고 아수라들의 왕 비로샤나의 이름을 빌렸으며, 거침없이 브라만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 그녀가 여인들을 약탈했던 것은 동질감 때문이었다. 늙은 부자에게 초경도 치르지 않은 딸을 팔아넘기려던 아버지를 두었던 자신과,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들에게 학대당하던 그녀들을 겹쳐 본 것이다.
"이대로 비참하게 살것인지, 아니면 내게 약탈당하여 이 곳을 벗어날것인지 선택하라!"
약탈당할것을 선택한 여인이 아흔아홉이었다. 그녀들은 비로샤나의 어미이고 누이이며 비로샤나 자신이었다. 카르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
그러던 어느날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카르나가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났다. 태양의 갑옷은 어디 갔는지 온 몸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상처 투성이였다. 마치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몰골에 아누슈카 역시 기함했다. 카르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숙적과 결투를 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다.
"결투 전에 몸을 상하게 하는 전사가 어디에 있는가!!"
아누슈카는 분노하고 슬퍼했지만, 카르나의 앞길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한 명의 어엿한 전사였다. 아누슈카는 찬드라의 축복이 담긴 은팔찌를 카르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신의 저주를 제외하고 저주를 막는 신묘한 보물이었다. 아누슈카가 수많은 크샤트리아와 브라만을 죽이고 약탈했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태양신의 아들 카르나. 나는 당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카르나는 아내의 믿음을 업고 전장에 섰다. 그리고 무참하게 진흙 위를 구르며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카르나를 주살한 아르주나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아누슈카는 그 소식을 부정하며 직접 아르주나를 찾아갔다. 과연 모두의 앞에 선 아르주나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고, 남편이었던 자는 목이 잘려 있었다. 카르나아ㅘ 직접 칼을 맞댔던 아누슈카는 아르주나가 부정한 수를 썼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즉시 카르나의 머리 없는 시신이 안치된 궁으로 숨어들어가 인드라의 창, 바샤비 샤크티를 훔쳤다. 신의 창은 자격이 부족한 이를 거부했다. 찬드라의 은팔찌도 없던 탓에 창을 쥔 손부터 저주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아누슈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비로샤나의 가면을 썼다.
*
비로샤나가 카르나의 창을 들고 모습을 나타내자 모든 이가 두려워하며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카르나의 창이다. 신의 창으로 왕자의 목을 따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군. 나와라. 아르주나!"
옷 위로 드러난 상반신은 이미 저주로 반쯤 먹힌 상태였으나 비로샤나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몰골에 모두가 두려워하며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기 위해 애를 썼다. 아르주나는 비로샤나와의 싸움을 받아들였다.
공방전은 치열했으나 길진 않았다. 아르주나의 화살이 비로샤나의 심장을 꿰뚫고, 비로샤나의 창이 아르주나의 옷을 찢고 가슴팍에 바늘같은 생채기를 남겼다. 비로샤나는 전차 밖으로 나가떨어지면서도 창을 놓지 않았다. 이미 저주에 ㅁ거힌 심장은 둥근 구멍이 뚫렸음에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아싿.
"아르주나여. 카르나는 온 몸의 피부가 벗겨졌어도 나보다 훌륭했다. 무슨 술수를 썼느냐? 얼마나 더러운 수를 썼기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카르나의 목을 베었느냐."
비로샤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고민끝에 입을 열었다.
"그가 탄 전차가 넘어졌을때, 빈틈을 노려 그를 쏘았다."
비로샤나는 아르주나를 응시했다. 아수라의 가면을 쓴 도전자는 통렬한 웃음을 터뜨렸다. 깨진 가면이 바닥을 뒹굴었다. 비로샤나는 바샤비 샤크티로 하늘을 겨누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외쳤다.
거기까지였다. 아누슈카는 창을 놓치고 저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저주로 반 이상 침식되어 있음에도 평온했다.
"아르주나여. 너는 네 스스로 족쇄를 찼구나. 카르나의 이름이 네 평생을 따라다닐 사슬이 되었구나. 내가 너를 저주하기도 전에 네 스스로 너를 저주하고 말았으니, 내가 손을 쓸 이유가 없다."
아누슈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아르주나는 아누슈카의 목을 베지도 않았고, 만천하에 비로샤나의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다. 상처 없이 멀쩡해보이는 아르주나와, 모습을 감춘 비로샤나를 보고 많은 이들이 비로샤나가 결투 도중 비겁하게 도망을 친 것이 아니냐며 입을 모았다. 아르주나는 비로샤나의 행방에 대해 끝끝내 침묵했다.
아누슈카는 아르주나의 궁전 깊숙한 방에서 눈을 떴다. 저주의 진행은 거의 멈춰있었다. 신께 사랑받는 자-아르주나의 손길이 닿았던 탓이다. 아누슈카는 아르주나에게 왜 나를 살렸냐 물었지만 아르주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시종들의 손도 빌리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아누슈카를 돌보았다.
3일째 저녁, 아르주나는 맥락 없이 입을 열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크리슈나에 대해 입에 올린 것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나 깊게 맺혀있던 앙금에 말은 두서없고 매끄럽지 못했지만 아누슈카는 묵묵히 그 고백을 들었다.
아르주나의 말이 끝났다. 아누슈카는 웃었다. 역시나 죽어가는 자 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아르주나여. 너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결벽하구나. 네 안의 어둠은 누구나 품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고결하여 사랑받는 자라면 그런 어둠 따위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누가 그렇게 정했다더냐? 신마저도 정결치 못해 우스운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데 한갓 인간이 어찌 완벽할 수 있다고? 아르주나여, 들어라. 네가 누구에게 얼마나 대단한 사랑과 기대를 받고 있건,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너의 문제이고 네 자유다. 달갑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주고 기대하는 이야말로 배은망덕하고 무례한 이 아니더냐."
아르주나는 당황했으며, 분노했고, 마침내 좁은 방을 뛰쳐나갔다. 다음날 아침 아르주나는 신부가 쓰는 관과 예물, 그리고 신성한 붉은 염료가 담긴 작은 접시를 가져왔다. 그는 아누슈카의 머리에 신부의 관을 씌우고 목에는 예물을 걸어준 뒤 이마에는 붉은 점을 찍어주었다.
"아르주나여. 나의 예물을 감당할 수 없다면 이 기만들을 거두어가라."
아르주나는 예물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거둔 아흔아홉 자매들의 평생을 책임지는 의무. 그것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예물이다."
아르주나는 무거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누슈카는 하루동안 아르주나의 아내로 지낸 뒤 숨을 거두었다.
허약한 장남에게 만일의 사태가 있을 경우 대신하기 위해 가진 둘째. 그러나 결과는 딸이었고, 아픈 장남을 돌보는데 집중하기 위해 텐쇼인 가문의 분가에 속하는 부부에게 입양된다. 이름을 지어준 것 역시 양부모였다. 자식이 없는 부부는 6살 때 까지 치히로를 정성을 다해 키우지만, 치히로와 에이치의 혈액형이 동일하고 유전형질이 거의 비슷해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다시 본가로 오게 된다.
하루아침에 바뀐 상황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있던 어린 치히로는 에이치와 맞닥뜨려 대판 말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에이치는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치히로 앞에서 기절. 에이치가 쓰러지고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엠뷸런스가 달려오는 광경은 치히로에게 크나큰 트라우마가 된다.
감기도 몇 번 걸려본 적 없을 정도로 건강체질인데다가 운동신경이 뛰어나며 머리도 좋은 팔방미인형 천재. 그러나 계집아이는 똑똑해서 좋을 것 없다는 어른들의 꾸지람과 더불어 자신의 우수함이 에이치를 압박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며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것만 배우며 지냈다. 덕분에 다도나 꽃꽃이 등등 교양 공부 쪽은 우수하다. 실제로는 한없이 밝으며 정신 사나울 만큼 활발한 성격이지만 가문 어른들과 에이치 앞에서는 극도로 위축되어 조용하고 고분고분해진다.
자기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한다. 애정결핍이 원인.
정규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너무 어릴때 본가로 도로 끌려온 탓.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모든 과정은 모두 홈스쿨링으로 학습받았다. 유메노사키 학원이 치히로가 입학한 첫 학교.
인간관계가 극도로 협소하다. 또래 친구는 아예 전멸상태인데다가 어른들을 제외하면 에이치와 케이토가 전부.
덕분에 친구를 사귀는 법은 물론, 사람대 사람으로 교류하는데 많이 서툴다.
에이치가 쓰러지던 날의 기억때문에 에이치의 말에는 고분고분하다. 본래 성격이 드러날 때는 케이토와 단둘이 있을 때 잠깐 뿐. 덕분에 가정교육으로 배우지 못한 사소한 상식이나 세상물정 따위는 모두 케이토가 가르쳤다.
그나마도 만났던 시간의 절대량 자체가 부족해 군데군데 일반 상식이 부족하다.
외출 경험 자체가 거의 없는데다가 혼자서 돌아다녀본 경험도 몇 번 없다. 덕분에 경험부족형 길치.
나이 터울이 있어 에이치와 치히로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에이치가 일부러 치히로에게 조기입학을 하기에 적절한 수준까지의 공부를 요구했고, 치히로는 거뜬히 1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유메노사키 학원에 조기입학하는데 성공한다. 같은 공간 내에 있으면 긴급하게 수혈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사태에 대응하기 좋다는 핑계가 집안 어른에게도 먹힌 덕분에 반대는 크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해."
케이토는 에이치의 말을 호의적으로 해석해서 설명해주었고, 치히로는 처음으로 자기가 해야 할 것이 아닌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포기와 순응에 익숙해진지 오래라 좀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해 고민 중.
1-A반, 프로듀서과.
연극부 소속.
히비키 와타루
치히로와 만나자마자 어떤 아이인지 파악을 끝내고 연극부에 들어올 것을 추천한 장본인이며 치히로가 유메노사키 학원에 적응하도록 도와준 사람들 중 하나. 치히로와 단둘이서 대화를 주고받으면 둘 다 한도 끝도 없이 텐션이 올라가버린다. 히비키는 들뜬 와중에도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것이고, 치히로는 정말 한없이 들떠버린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
마시로 토모야
치히로가 아직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조용할 무렵, 잠깐동안이지만 얌전한 아이인줄 알고 설렜었으나 히비키와 손발이 짝짝 맞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모든 기대를 버렸다. 소년의 봄은 그렇게 끝이 나는 듯 했으나....
하스미 케이토
치히로의 교내 보호자 취급. 치히로가 2층에서 뛰어내리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망갔다거나 학교 비품을 부쉈다거나 여하튼 치히로가 사고를 쳤다면 모두 케이토에게 연락할 정도. 또한 길을 잃고 헤메는 치히로를 발견한다면 케이토에게 데려다 주면 어쨌든 해결된다.
키리츠구는 쌍둥이 아이들의 입양 수속을 밟는 동시에 집을 정비하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딸이 있는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남자였다. 두 아이의 방을 분리 해 주어야 하나? 아니면 어릴 때는 같은 방을 쓰게 하다가 추후에 분리를 해 주어야 하나? 가구의 모서리에는 안전스펀지를 붙여야 하나? 아니, 가구 자체를 어린이용으로 사는게 옳지 않을까? 식기는? 의복은? 장난감은 어떤 것으로 하지? 어린이의 여린 피부가 다다미가 깔린 좌식 생활을 견딜 수 있나? 게다가 키리츠구는 평범한 집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까지 고려해야 했다.
이제 에미야의 성을 잇게 된 두 아이는 비록 키리츠구의 마술각인을 물려받지 않았지만, 마술사의 아이들이었다. 각기 재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술사의 피를 이은 징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아이들을 고려하면 마술의 교육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리츠구가 보금자리가 될 집을 선택하는데 영맥을 고려한 것은 그때문이었다.
키리츠구는 몇 없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퇴원 날짜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후지무라 타이가가 이론과 현실은 다르며 도리어 이렇게까지 과하게 준비를 할 경우 실수를 할 수도 있다며 조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과연, 타이가의 충고는 치리츠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실현되었다.
*
적요에게는 희귀한 마술 특성과 더불어 마술 회로 역시 거듭 수련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아마도 진흙의 범람이 불러일으킨 화재 속에서도 마술을 이용해 동생과 자신을 지킨 것이 아닐까 추측될 정도였다. 그에 비해 시로는 마술 특성이 애매하고 마술회로는 전혀 사용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마술 가계는 1인 전승. 그 탓에 자식이 둘 이상일 경우 가계를 계승하지 않을 아이에게는 아예 마술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경우가 많다.
그 탓인지 적요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화재 현장에서도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아이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지극정성으로 동생을 돌봤다. 편식하지 않도록 식사를 챙겨주고 양치질을 챙겨주는 것 부터 혼자가 무서워 우는 동생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 까지. 손이 많이 갈 것을 각오하고 육아서적까지 한 권 사 놨던 키리츠구의 준비가 무색하게도 적요는 키리츠구의 식단과 생활 습관까지 거침없이 단속하기 시작했다. 키리츠구는 일평생을 통틀어 자신의 적절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자각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분명 그는 유서 깊은 명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럴듯한 가정을 이루기는 했지만 아인츠베른은 상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는 거의 가치가 없는 가문이기도 했다. 키리츠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두색 눈동자에게 등 떠밀려 어렵사리 습관을 고쳐나갔다.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비누와 샴푸를 사용하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단계를 거쳐, 그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짜 가족이 되어갔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적요는 간단한 심부름을 가며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고민거리를 다시 끄집어냈다. 영문 모를 화재사건 이후, 깨어나서는 안될 기억이 깨어났다. 병상에 누워있는 적요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친 몸 보다는 봇물 터지듯 뒤엉킨 전생의 기억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적요는 도와달라며 자신을 끌어안던 새하얀 팔들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요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곳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목소리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다는 것 정도였다.
마술과 마술사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적요는 다시금 자신의 마술회로를 의식했다. 특별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사 장기는 힘을 사용할 때 마다 신경통에 가까운 통증을 낳곤 했다. 꼭 필요한 힘이기에 사용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남동생이 이런 힘을 사용한다고 나선다면 뜯어말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적요는 자신을 반겨주는 가게의 여주인에게 배꼽인사를 한 뒤 가게 안으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성과 없는 고민 대신 새로운 고민이 적요의 머릿속을 채웠다. 다름 아닌 양부의 건강에 대한 고민이었다.
키리츠구에게서는 정체불명의 화재가 났던 밤, 지척까지 밀려들어왔던 끈적한 것의 기운이 엷게 묻어났다. 그저 그렇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이라면 다행일텐데 불쾌한 기운이 점점 강해질수록 키리츠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좋지 못한 것이 키리츠구의 생기를 빨아먹는 느낌이었다. 적요가 키리츠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것은 분명 의학적 처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마술적인 문제일 텐데, 적요는 아직 마술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키리츠구 역시 마술사인 것 같지만 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는 키리츠구의 역량 역시 넘어선 일인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을까.
적요는 진열대에서 한 뼘 사이즈의 조그만 간장병을 집어들었다. 키리츠구는 작은 간장을 사고 남는 거스름돈으로는 간식을 사도 좋다고 하며 백 엔 짜리 동전을 다섯 개나 동전지갑에 넣어주었다. 적요는 목에 동전지갑을 목걸이처럼 건 채 유제품 코너로 향했다. 시로가 좋아하는 푸딩을 사기 위해서였다. 가끔가다 화재의 기억을 떠올리고 침울해지는 동생을 달래주기에는 푸딩만한 것이 없다. 적요는 푸딩 두 개와 간장병을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적요가 가게를 돌아다니는 내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던 가게 주인은 고양이를 모티브로 만든 가방에 푸딩과 간장을 넣어준 뒤 야무지게 지퍼를 여며주었다.
작은 머릿속 가득 고민거리를 담고 돌아가던 적요는 모퉁이를 돌던 와중 다른 사람과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자 태양을 등지고 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적요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붉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비틀비틀 일어나 얼얼한 엉덩이를 털던 적요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마주하곤 당황을 금치 못했다. 맹세컨대 적요는 이 남자와는 초면이었다. 허리까지 숙여가며 코가 닿도록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남자는 마치 꿰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적요를 바라보았다. 적요는 저 붉은 눈 너머에 일렁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20년 남짓의 세월을 짊어졌음에도 파악하기 힘들 만큼 무겁고 맹렬했다. 남자는 아무런 전조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 해당 드림 연성의 오리주 이름은 '적요'. 세계관에 맞지 않는 이름이지만 오리지널 설정이 있는 캐릭터라 그렇습니다.
+ 5차 성배전쟁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구원 및 역하렘 드림입니다. 스토리 파괴 있습니다.
+ 다소 먼치킨입니다.
<오리주의 대략적인 이미지>
이름 : 적요
나이 : 22세
성별 : 여성
키 : 150대
외형 : 연두색 눈, 주홍색 머리카락. 장발.
머리스타일은 반묶음 / 포니테일 / 말아올리기 주요 바리에이션.
옷을 입으면 말라보이지만 잔근육이 탄탄한 몸매.
11자 복근 있음(노력의 산물).
특이사항 : 인류의 선의라는 개념의 요청 하에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영혼.
차후 해당 개념의 아바타가 되어 인류를 인도한다.
생존 당시 마술속성은 허虛, 마술특성은 이동.
목표 : 아무도 외롭지 않은 세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세계.
누구도 혼자 울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것.
다만 자신의 꿈이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생전에 목표를 달성하는 것 보다 자신이 이 목표를 위한 초석이 되는 것이 제1 목적.
바닥 없는 어둠 너머에서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그녀를 부른다. 그녀는 그 부름을 쫓아 세계의 경계로 다가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혼은 세계를 가르는 경계에 근접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자아가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나 꺼림칙 해 할 곳에 접근하던 그녀는 의식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머금은 몸뚱이는 점점 더 가라앉아-마침내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무수한 팔이 뻗어나와 의식을 잃은 그녀를 잡았다. 희고 반투명한 팔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발목을 잡고, 감싸듯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세계가 신음했으나 그들은 무사히 그녀를 자신들이 속한 세계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더욱 힘 있는-뿌리깊고 견고한 개념이라면 안전하게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잉태된지 얼마 되지 않은 미약한 힘인지라 그녀가 전면적으로 협조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뻗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계의 선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보호하며 속삭였다.
[-를 부탁해요.]
*
적요는 평범한 아이였다. 역사가 짧은 마술사 가문의 장녀라는 것만 제외하면. 부모는 허虛 속성을 타고난 장녀를 일찌감찌 후계자로 점찍고 쌍둥이 중 동생에 해당하는 사내아이는 평범한 아이로 키워나갔다. 부모의 마술사 교육은 혹독했으나 기반에는 혈육과 미래의 마술회로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었고 남매 사이의 우애도 돈독했다. 단란한 가정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네 번째 성배 전쟁의 여파가 후유키 시를 덮쳤다. 아직 제대로 된 마술사로서의 성과를 내지 못한 부모는 오염된 성배에서 흘러나온 검은 진흙 때문에 먹혀 즉사했다. 아이들은 불타는 집 안에 갇혀있었다. 때마침 동생과 함께 있던 적요는 검은 연기를 마시고 기침을 하는 동생을 안고 배워본 적 없는 힘을 발동했다. 깜빡임처럼, 두 아이는 잠시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 사이 기둥을 잃은 집이 무너져 두 아이는 지붕 위에 쪼그려 앉아 새카만 하늘을 짊어졌다. 온 세상이 뜨겁고 맵다. 적요는 고통스러운 열기 속에서도 동생을 품에서 놓치 않았다. 마술회로를 가동할 때 보다 더 한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동생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절망이 그녀의 머리맡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적요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화마가 덮친 세상을 바라보았다. 눈 닿는 곳마다 불길이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구나. 도망치려 해도 과부하가 걸린 마술회로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적요는 절망감 속에서 조금이라도 남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불꽃 속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적요는 저 실루엣이 환각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검고 검은 남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적요와 동생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그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울음 섞인 속삭임을 끝으로, 적요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에미야 키리츠구는 성배의 진흙 속에서 발견한 두 명의 생존자를 살리기 위해 아발론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아발론은 단 하나 뿐. 키리츠구는 화상이 심각한 여자 아이와 비교적 부상이 덜한 남자 아이를 보며 망설였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아발론이 스스로 쪼개졌다. 키리츠구는 길이가 절반으로 쪼개진 아발론을 각각 두 아이의 몸에 심었다.
*
남매는 시의 병원에서 눈을 떴다. 이란성 쌍둥이였지만 머리색과 이목구비가 가족이라 판단하기에 충분할 만큼 닮았기 때문에 두 아이의 침대는 나란히 붙어있었다. 적요는 깨어나자마자 붕대와 깁스로 구속당하다시피 한 몸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던 간호사는 뒤늦게 적요의 이상행동을 발견하고 기겁을 했지만 그녀는 바로 옆 침대에 누운 동생을 확인 한 후에야 몸부림을 그쳤다.
그제야 병원 냄새가 느껴졌다.
“쌍둥이 오빠니?”
“동생이예요.”
재난을 겪고 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또렷하다.
“이름은?”
소녀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기억이 나는데 성이 기억나지 않는다. 간호사는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달랬다. 그 사이 남동생 역시 깨어났다. 두 아이는 간호사의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한 뒤 몸상태를 점검받았다. 간호사는 예후가 긍정적이라며 기뻐했다. 두 아이가 서로를 보며 성급하게 마음을 놓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적요도, 시로도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특히나 부상이 위중해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했던 적요로서는 저 남자가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남자는 간호사의 양해를 구하고 두 아이가 있는 침대 사이에 간이 의자를 대고 앉았다. 꼭 닮은 두 아이의 시선이 키리츠구가 움직이는대로 따라왔다.
키리츠구는 아발론을 나눠 가진 두 아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닮은 생김새지만 여자아이쪽이 조금 더 상처가 크다. 끔찍한 상처를 입고도 남동생을 놓지 않았던 탓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키리츠구는 애초에 말솜씨가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설프게 대화의 물꼬를 텄지만 결국 자연스럽지 못하게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고아원이 좋니. 아니면 처음 만난 아저씨랑 같이 가는게 좋니?”
에미야 키리츠구는 핏물과 후회로 범벅된 손을 내밀었다.
두 아이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키리츠구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사내아이는 방황 끝에 키리츠구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여자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듯 고개를 숙였다. 키리츠구는 말없이 답변을 기다렸다.